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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이야기

드라마 철인왕후의 철종 이야기, 조선 25대왕 철종

by DD-hope 2021. 1. 5.

안녕하세요, DD입니다.

요새 꺄르르 웃어가며 는 드라마 중 철인왕후가 있습니다. 드라마 초반 많은 질타와 역사왜곡이라는 이슈가 있었죠. 그래서 드라마 철인왕후의 시대적 배경을 공부해봤습니다.

 

 

 

 

백과사전 속 철종

휘(諱) 변(昪). 초명 원범(元範). 자 도승(道升). 호 대용재(大勇齋).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장조(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비(妃)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이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妃)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德完君)에 책봉되었으며, 1849년 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1851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를 삼았다. 문근은 국구(國舅)로서 정권을 장악,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1852년부터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에 어둡고,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으로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정세에서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失勢)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능(陵)은 예릉(睿陵:高陽)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종 [哲宗] (두산백과)

 

 

 

 

철종 요약

 

1. 농부였던 아주 먼 왕족

원범(철종)의 지난 삶

원범(철종)은 선대 왕인 헌종의 7촌 아저씨 뻘로, 왕좌와는 관계가 멀어 관심 없이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였습니다. 준비 없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죠.

 

삼형제 중 막내인 원범(철종)의 승계

선대 왕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명으로 헌종의 7촌 아저씨 뻘인 원범(철종)이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삼형제 중 막내이나, 첫째인 원경은 민진용의 반역에 엮여 사사되고, 둘째 경응은 기록에 남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화도에서 병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죽은 뒤 명을 받은 원범은 봉영의식을 행했고,

이틀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다음 날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습니다.
명을 받은 3일 뒤 바로 왕이 되었던 겁니다.

 

 

 

 

 



 

 

 

 

2. 부족한 준비 그러나 민생을 돌보고 싶었던 왕

왕이 된 원범(철종)

원범(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은언군)의 손자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왕이 아닌 형제, 그들의 자손들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죠. 그래서 원범(철종) 역시 농사를 지으며 한문은 깊게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는 철종이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고 하여 1851년까지 2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철종의 친정

1831~1863, 재위기간 : 1849년 6월~1863년 12월(14년 6개월)

철종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지배층의 농민 수탈이 절정이던 시기였습니다. 전정, 군정, 환곡,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죠. 토지세를 땅 주인이 아닌 빌려서 농사짓던 농민에게 물고, 이자없이 빌려주던 곡식에 이자를 붙이거나 환곡 양을 속이고, 양반층과 양민의 증가로 가난한 농민에게만 군포 부담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철종은 민란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드라마 속 철종(김정현 분)이 낮에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안동 김씨 세력을 눈을 피하고, 어두운 밤 예리하고 빈틈없이 변해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러나 철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이미 조선은 안동 김씨의 막강한 힘으로 바꾸어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3. 세도정권하에서의 철종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순조시절부터 60년간 이어져왔습니다. 순조의 비인 안동 김씨家의 순원왕후(철종의 대왕대비)부터 시작되었던 거죠. 철종이 즉위한 위 순원왕후는 근친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세우고 이가 바로 철인왕후입니다.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 일파에 있었고,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려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백성들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하여 철종 말기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는데 ‘삼정의 난’이라고 불립니다.

 

철종은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세대정치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었고, 강고한 세력 앞에 뜻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안동 김씨 일가는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를 미리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철종은 이러한 안동 김씨의 전횡에 대항할 방법이 없어 국사를 등한시 하고 술과 여색에 빠졌으며, 급속도로 쇠약해져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33세에 죽었습니다.

드라마 초반 철인왕후의 몸에 들어간 주인공이 내뱉은 대사 중에 철종에 대한 평가는 안동 김씨 세력에 포기한 이후의 철종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정치형태로, 세도정치[世道]는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정치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정학을 북돋는 일 등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언록과 인재의 등용, 군주의 신임, 위탁이 필요했으나, 계파 간 분열과 사화, 당쟁이 생겼으며,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를 하여 세도[勢道]로 나눠 표기합니다.

출처 : 웅진지식하우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

원래 세도정치란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으나, 척신(戚臣) 또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시대적 배경 - 삼정의 문란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

 전정은 공정하고 정확한 전지(田地)의 조사와 측량을 바탕으로 1년에 소출되는 양을 검사하여 균등한 전세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전지에 대한 조사가 20년에 한번씩 이루어지도록 규정되었으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출량에 대한 조사도 담당자인 수령과 토호들의 농간에 의해 공정한 세금부과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극대화되었다. 그 유형으로 실제 소유하지 않은 토지(공지, 空地)에 세금을 징수하는 백지징세(白地徵稅), 실제 세액의 몇배를 징수하여 착복하는 도결(都結)과 방결(防結), 각종 부당한 명목의 잡세 등이 있다. 이를 전정의 문란이라 한다.

군정군적(軍籍)에 따라 번상병(番上兵)을 뽑고 보포(保布)를 정급(定給)하여 주는 제도였으나 15세기 말부터 군포를 내고 군역을 면제받는 관례가 생겨난 뒤 임진왜란 이후에는 직업군인이 생겨나고 군에 가지 않는 대상자들은 군포를 부과하는 방법으로 수취제도가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대다수 돈있는 백성들은 군포를 내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군포가 부담되자 향교의 교생(校生)이나 서원의 원생(院生), 향직, 향안에 등재, 공명첩(空名帖) 등의 방법으로 군포 면제를 받는 편법이 등장하였다. 이에 군포가 줄어들자 지방 관아에서는 이웃에게 군포를 강제 징수하는 인징(隣徵), 가족에게 강제로 징수하는 족징(族徵), 마을 단위로 전체의 군포액수를 부담케 하는 동징(洞徵), 어린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자의 이름으로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과 같은 불법징수가 성행하였다. 이를 군정의 문란이라 한다.

환정은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돌려받아 농업의 재생산을 도모하고 군자미를 매년 새로운 곡식으로 전환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빌려준 곡식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자연적으로 소모되는 곡식이 증가되자 모곡이라 하여 1/10을 이자로 더 돌려받게 되었다. 이후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아전들의 횡포가 늘어나면서 모곡의 양이 1/10에서 1/2로 늘어나는가 하면 빌려주는 원곡에 모래나 겨를 섞어 실제 양을 줄이고 후에 거두는 모곡은 원곡대로 받는 등 다양한 편법이 자행되었다. 이에 환곡 받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배부하거나, 이자를 돈으로 내도록 하여 아전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를 환정의 문란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을 합하여 삼정의 문란이라 하였으며, 1811년 홍경래의 난이나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농민항쟁 등 19세기 크고 작은 농민항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렇듯 오랜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철종은 원하지 않았으나 준비없이 갑작스레 왕이 되었고, 극복하고자 했으나 거대한 세력에 쓰러지고 말았던 비운의 왕입니다.

철종과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해 도움이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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